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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단 - 출가수계의지 확립, 하화중생의 발아 (4)

작성자
bongryeogwan
작성일
2019-12-15 22:40
조회
118

그렇다면 비양도를 다녀온 후부터 1907년 9월 제주도를 벗어날 때까지 봉려관의 행적은? 이 기간 봉려관 행적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거의 없고, 그나마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혁암산고 유관음사기>의 "불문에 귀의하였다. 촌락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부처님의 복덕으로 인도하기를 5, 6년을 하였는데, 그 간 수백인의 시주를 얻어 기유년(1909) 봄에 이 절을 창건하였습니다."고 한 이 내용이다. '불문에 귀의했다'는 것은, 비양도를 다녀온 후 고통에 처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원을 세운 것을 가리킨다고 필자는 본다. 결코 서상수계를 의미한 것은 아니다. 광제중생의 원을 세운 후, 줄곧 봉려관은 촌락을 다니면서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민중을 불법으로 인도하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사료된다.

대흥사에서 삭발 수계한 봉려관은 1908년 1월 5일 귀도한다. 귀도한 후의 거처는? 산천단과 고향 화북 두 설이 있다.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은,

4월 불상을 봉안하고 재를 시설했다. 그러나 토착인 오백여명이 몰려와 모두 극력하게 봉려관을 쫓아내며 말하기를 "이런 물건을 이대로 두면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게 해서 속여 세상을 어지럽게 해 반드시 큰 화를 불러올 것이니 쫓아내야 한다."고 하면서 집에 불을 질러 버렸다. 봉려관 스님이 거의 불에 타 죽을 뻔 했지만 겨우 불을 피해 나오니, 천지간에 집 없는 객이라 할 만 하다.

필자는 화재로 인해 나온 집은 산천단에 있는 집으로 본다. 1901년을 전후로 해서 이미 화북 동리에서 쫓겨 나와 산천단에 새 거처를 마련했고, 여기에서 출가수계를 위해 대흥사로 갔다. 그리고 수계 후 발생한 화재가 화북 동리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다시 산천단 거처로 가면 된다. '천지간에 집 없는 객이라 할만하다'고 한 것은 산천단의 거처 마저도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암시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므로 수계 후 귀도해서 간 거처는 산천단이라고 본다. 4월에 '설재'했다는 것은, 아마 '부처님 오신날' 행사를 가리킨 것 같다.

산천단에서도 쫓겨 나온 봉려관은 한라산 백록담 근처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은,

갈 곳 없이 걸어서 가다보니, 이미 백록담 주변에 가 있었던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7일간을 아무 것도 먹지 못해 거의 기진맥진한 상황에서 서원하기를 "중생을 제도하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죽겠습니다." 그리고는 가파른 계곡 아래로 몸을 던져버렸다. 기이하도다! 수천마리의 까마귀 떼가 나의 옷을 물어 나를 구제하였다. 또 한 노인이 나타나 일러주기를 "산천단으로 내려가면 저절로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잡목 덤불이 우거진 곳이어서 옷을 꿰맬 것조차 없어서, 입은 옷 그대로 간신히 산천단에 도달하니, 남달리 보이는 운대사라는 스님이 있었다. 운대사는 "그대를 찾은 지 오래되었는데 오늘에야 다행히 만나게 되었다."고 하면서 가사를 내어서 주었다. 이 무슨 징조인가? 해를 넘겨 다음 해 기유 봄에 한라산에 사찰(건물)을 창건했다.

 여기까지가 <관음사 봉려관 비문> 원문 마지막이다. 현재 관음사에 소재한 봉려관의 비석과 비문에 관련해서는 이하 '봉려관의 입적'에서 언급할 것이다.

까마귀 떼가 봉려관을 구명한 이야기도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진원일이 이와 관련해 "봉려관 스님은 어느 날 저녁에 H군과 필자를 포교당 동쪽 집으로 불러 방에 앉혀놓고 이상과 같이 이야기를 한 뒤에 궤 속에서 수 없이 많은 구멍 뚫어진 흑색 장삼을 끄집어내어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 장삼에 구멍들이 수천 마리의 떼 까마귀가 주둥이로 물어 뚫어 놓은 구멍이다! 함지사지이후생 이란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느냐?'하였다고 전한다.

진원일의 증언은 봉려관과 떼 까마귀의 이야기가 사실로 있었던 것임을 확신시켜 줄뿐만 아니라, 봉려관의 인생관도 엿 볼 수 있게 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봐야만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이 말은, 봉려관의 한 생애를 충분히 대신할만한 격언일 뿐만 아니라 봉려관의 인생관이기도 하다.


<발췌 :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 - '근대 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 / 2018. 11. 22 / 혜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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