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료 실
1900년 후반 ~ 1901년
진원일은 이르길,
동리 청년들이 모여와서 요망스러운 계집이라 하고, 불상을 때려 부수며 다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때려죽이겠다고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그 집을 팔아버린 후 산천단에 가서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짓고 관음정진을 하며 불상을 구하려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비양도에 불상이 있다는 소식을 드고 그것을 구하기 위하여 37세 되는 서기 1901년 봄에 비양도를 건너가려했다.
<관음사 봉려관 비문> 원문에는,
부지런히 여기저기 참방하던 중, 신출(1901년) 봄에 곧 비양도로 건너갔다.
종합하면, 봉려관이 어떤 승려에게서 받은 목불상은 화북 청년들에 의해 파손되었고, 불상없이 화북을 나와 산천단에 거처를 다시 마련한다. 그리고 봉려관이 비양도로 불상을 구하러 간 시기는 1901년 봄이다. 계속해서 기술하기를,
중간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침몰하게 되었다. 일심으로 지성스럽게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의복이나 버선이 젖지 않고 비양도 어느 집에 무의식 중 들어가 있었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이라 해서 그 후 더욱 부지런하게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비양도에서 불상을 구하지 못하고 ......
<관음사 봉려관 비문>의 원문(오이화 생전에 작성 된 것으로 사료됨)에는,
비양도로 가던 도중 바다 한 가운데에서 맹렬한 폭풍을 만나 배가 거의 전복되려했다. 당황해 허둥지둥하던 상황에서 봉려관은 도리어 지성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고, 어언 간에 옷과 버선이 젖지 않은 채, 비양도에 도착했으며, 그리고는 바닷가 어느 집에 머물게 되었다.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이렇게 무사한 것임을 문득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상생활 하던 중에도 일찍이 이 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다. 비단 염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구제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하였다. 마침내 이르길 "만일 나의 뜻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면 맹세코 머리를 빗지 않을 것이다."라고 혼자 되뇌었다.
즉 봉려관이 자연적인 악조건 속에서 관음신앙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비양도로 가다 태풍을 만나 관세음보살의 위력을 체험하게 되었고, 이후 더욱 부지런히 관음정진에 매진한다. 비양도 가던 도중의 체험은 어떤 어려움도 관음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 부여에 일조한다. 여기에서의 체험이 향후 제주불자의 신앙관과 수행관 방향조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발현되도록 하였다. 결국 비양도에서의 체험은 봉려관에게 하화중생의지를 발아하게 한 밑거름 역할을 하였고, 하화중생의 비장한 의지는 비양도에서 돌아온 후 산천단에서 발아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비양도에서 불상을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온다. 태고종 제주종무원에 소장된 <탐라불교사료>에서도,
광무 5년(1901년:신축년) 37세 때 비양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돌풍을 만나서 배가 전복되었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을 연창하였는데 어느 사이에 몸은 무사히 포구에 표착되고 있었다. 이때부터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에 감복되어 자나 깨나 앉아서나 누어서나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면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출가할 것을 결심하였다.(김봉옥 친필원고)
비양도에서 되돌아오는 도중에 돌풍을 만났다고 기술한다. 돌풍을 만난 시점이 <관음사 봉려관 비문> 또는 진원일의 서술과는 다르지만, 돌풍으로 인해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맥락은 같다. 그리고 이후 더욱더 관음정진에 전념했고, 중생제도의지 발아에 도움이 되었다는 내용 역시 큰 차이가 없다.
이상을 종합하면, 현목련을 출산한 후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현씨 집을 나온 것으로 사료되고, 같은 동리에 집을 구입한 후 이곳에서 거주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을 것으로 유추한다. 같은 동리에 새 거처를 마련한 것은 당시 현목련의 출산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 사료된다. 그리고 당시 사회는 상호간 관심이 지대해서 주위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일에도 설왕설래가 잦던 시대이고, 봉려관의 관음정진수행 역시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새 거처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척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비양도에 간 시점은 <관음사 봉려관 비문>의 '신축년(1901년 봄)'을 따른다. 필자는 봉려관이 1901년 봄 불상을 구하러 비양도를 가기 한두 달여 전에 산천단에 새 거처를 마련했을 것으로 본다. 반년도 안 되는 시간에 봉려관의 삶에는 아주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그녀는 이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가고 있었다.
<발췌 :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 - '근대 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 / 2018. 11. 22 / 혜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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