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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단 - 출가수계의지 확립, 하화중생의 발아 (1)

작성자
heawoldang
작성일
2019-12-08 15:15
조회
1291

산천단은 봉려관에게도, 근대제주불교에 있어서도, 제주도민에게도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본래 한라산 산신제단은 한라산 최정상부 정북 방향에 위치했었는데, 이약동(1416~1493)이 제주목사로 부임(1470년 10월 ~ 1473년 8월)한 후, 산신제를 지내다가 동사하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산천단에서 행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산천단이 제주도민의 한라산신제단이 된 것이다. 한라산신은 제주도민 생활 속에 뿌리깊게 자리한 매우 주요한 신앙대상 중 하나이다.

진원일의 기술에 의하면, 봉려관이 집을 나와 같은 동리에 새 거처를 마련하고 관음정진을 하였고, 이를 못마땅하게 본 동리청년들에 의해 쫓겨나 다시 산천단으로 옮겨와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짓고 거주를 시작한다. 필자는 이때를 1900년 늦겨울에서 1901년 초일 것으로 본다. 또 필자는 이 집을 산천단 소림사의 전신으로 보고 있으며,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산천단 소림사의 최초창건연대일 개연성도 있다고 사료된다. 왜냐하면 안광호와 법인의 구술에 의하면, 봉려관이 대흥사에서 수계를 한 후 대흥사에서 불상을 모시고 목탁 등을 준비하여 제주로 되돌아와서 거주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미 승려 봉려관이 있었고, 신앙대상인 불상이 있었으며, 불교의례를 집행할 장소가 구비되어 종교의식이 집행되었기 때문이다. 단 공식적으로 '사찰명' 또는 '포교당'이라는 현판을 갖추었는지 그 유무는 지금으로선 모른다. 이 부분은 향후 새로운 구술채록과 심도 있는 연구가 절실하다.

봉려관이 산천단에 거주한 기간은? 진원일은 서술하기를,

비양도에서는 불상을 구하지 못하고 그대로 산천단에 돌아와서 6년간을 쉬지 않고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 1907년 음력 9월에 중 될 생각으로 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를 찾아갔다.

봉려관이 산천단에서 승려가 될 의지를 확립한 것이다.

진원일에 의하면, 봉려관이 산천단에 거주한 것은 7년하고도 반년의 세월이다. 필자는 산천단 거주기간을 7년이 채 안될 것으로 본다. 산천단 거주 시작점에 있어서는 진원일과 필자의 견해는 다르다. 왜냐하면 필자는 목련의 출생(1900년 2월 9일 음)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봉려관이 수계를 결심하게 된 계기, 수계를 위해 제주도를 떠난 시기, 왜 수계 장소가 대흥사인가? 제주도에서 대흥사까지의 여정에 대한 검토를 해보자.

봉려관이 수계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에 의하면, 봉려관이 비양도를 가던 도중 태풍을 만나 배가 전복되려 하는 와중에 관음정진을 해서 의복과 버선이 젖지 않은 채 비양도 바닷가에 무사히 도착하게 된 것이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이라 믿었고, 그 후 계속해서 이때의 일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만 비단 염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구제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하였다. 마침내 이르길 "만일 나의 뜻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면 맹세코 머리를 빗지 않을 것이다."라고 혼자 되뇌었다. 1907년 9월에 곧 출가의지를 내고는 해남 대흥사로 갔다.

위 인용문에 의거하면, 고통에 처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봉려관이 출가수계를 결심한 계기이다. 1918년 3월 2일 <매일신보> '제주도 아미산 봉려암의 기적 - 꿈같은 기괴한 이야기'에서는,

바다 위로 솟는 해와 물결 사이에 춤추는 석양을 볼 때마다 높고 청정한 생각이 나며, 원포귀범의 노 젓는 소리며, 평소 낙안의 슬픈 울음을 들을 때마다 우리 인생의 허탈암을 느끼어 만경창파의 편주 같은 외로운 영혼을 위대한 부처에게 의탁하기로 하고, 홀연히 집을 떠나 여승이 되고 마셨다.

한 폭의 옛 산수화를 그려놓은 듯한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출가수계를 결심한 계기를 '높고 청정한 뜻' 그리고 '인생의 허탈함'이라 한다.

종합해 보면,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이 내용서술형식이나 전체 문맥연결 상 비교적 객관성을 띠고 있다고 본다. <매일신보>는 지면의 한계로 인해서인지 그 이유가 불분명하지만, 그간 봉려관의 많은 이야기는 생략하고 '높고 청정한 뜻' '인생의 허탈함'으로 승려가 되기까지의 긴 이야기를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굳이 연결시킨다면, '고통에 처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광제중생)'이 '높고 청정한 뜻'에 해당한다.


<발췌 :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 - '근대 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 / 2018. 11. 22 / 혜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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