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당 봉려관

근대 여성운동의 리더

여성 계몽활동

1925년 제주 번화가에 중앙포교당을 창건하면서 봉려관 스님의 관음정진을 통한 포교는 더욱 본격화 되었고, 제주여성에게 사회활동 동기를 부여하면서 당시 제주여성이 사회활동의지를 갖도록 유도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제주불교부인회’와 ‘제주불교소녀회’ 창립이다. 제주여성사회가 조직적으로 활동하도록 기틀을 마련하였고, 척박한 토질 그리고 섬이라는 지리적 환경에 처해 있던 당시 제주여성들이 새로운 문물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지역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비구니 봉려관 스님은 삶에 지쳐있던 일제강점기 제주도민에게는 희망의 불빛이기도 했다. 봉려관 스님이 마을에 내려오시면 당시 제주도민은 봉려관 스님을 만난 것만으로도 행복해 했고 매우 기뻐했다고 정대원각 보살(1900~1991)은 말한다. 

< 1926년 중앙포교당 부처님 오신 날 >

중창 불사

봉려관 스님은 관음사 내에 해월학원을 설립해서 교육에도 전념하였다. 그리고 고관사, 법화사, 불탑사 등 폐사된 사찰은 중창하였으며, 관음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과 간방에 새로운 사찰 혹은 포교당을 창건해서 관음신앙을 중심으로 제주불교를 재건해서 중흥시켰다. 

봉려관 스님은 사찰을 창건하거나 중창하고는 바로 비구들에게 주지를 맡게 하여 포교를 하도록 하고는, 다시 다른 사찰을 창건 또는 중창하기 위해 준비를 한다. 안도월 스님과 오이화 스님이 ‘관음사 주장 스님’이라 호칭했던 봉려관 스님은 근대제주불교를 관음신앙으로 재건시켰고, 관음신앙을 중심으로 제주의 부처님제자들이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도록 인도했으며, ‘내 나라를 되찾겠다!’는 민족적 자존심을 지켜 나가기도 했다.

 

< 1937년 법화사 부처님오신날 행사 >

 

< 1935년 불탑사 부처님오신날 행사 >

석연찮은 봉려관 스님의 입적

1938년 5월 29일(음) 점심공양을 마치고, 오후에 관음사에서 공양주를 데리고 산행을 나가신다. 산책 중 봉려관 스님이 야생버섯을 발견하고는 공양주에게 버섯을 채취해서 저녁에 끓여 대중들과 함께 먹자고 하셨고, 공양주가 그 버섯을 채취했다. 산행을 마치고 관음사로 되돌아온 공양주는 저녁에 채취한 버섯으로 국을 끓여 관음사 대중들에게 드리기 전, 먼저 봉려관 스님에게 한 그릇을 드렸고, 봉려관 스님은 이 버섯국을 2수저 드시자 바로 돌아가셨다. 공양주는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갔고, 이후 이 공양주는 제주도에서 인적이 드문 장소로 숨어 들어가, 아픈 사람들에게 약초를 처방해 주며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봉려관 스님은 약초와 버섯 등 야생식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아픈 사람이 오면 앓는 병에 맞는 약초를 알려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쾌차하였다. 이렇게 완쾌된 사람들은 고마운 마음을 밭이나 땅으로 대신해 보시했다. 약초와 야생먹거리에 해박했던 봉려관 스님이 독버섯을 모를 리 없고, 설사 독버섯 국을 드셨다 해도 2수저를 드시자마자 바로 사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안광호 스님(1915~1989)의 구술처럼 봉려관 스님은 항일운동자금조달 등 항일운동 한 것이 발각되어 독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시 제주사회에서 인지도와 영향력이 상당히 높았던 봉려관 스님의 입적에 대해 일체 언론매체가 이전과 다르게 입을 굳게 닫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또 제자 도월 스님의 7재 조문과 불교계 행사 또는 사건이 있을 때면 늘 글을 남겼던 회명 스님이 봉려관 스님의 입적과 관련해 쓴 추모의 글도, 7재 조문도, 즉금에는 보이지 않고 있고, 오이화 스님 등 당시 원로 스님들도 봉려관 스님의 입적과 관련해 마찬가지로 입을 굳게 닫았다. 해방 후에도 이들은 굳게 침묵했다.

그리고 왜 당시 근대제주불교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봉려관 스님의 비석이 세워지지 않았을까? 봉려관스님은 누군가가 맹독을 넣은 버섯국을 드시고 관음사에서 입적한 것이다.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는 봉려관 스님의 입적에 관해서 앞으로 밝혀져야 할 것이다.

 

< 관음사 해월굴 앞의 봉려관 스님 석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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