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당 봉려관

제주 항일운동의 빛

[BBS 뉴스] 제주 관음사 창건주 ‘안봉려관 스님’ “항일 독립운동 재조명” 2019. 5. 27 >

해남 대흥사

1909년 7월 봉려관 스님은 해남 대흥사에 갔고, 1909년 7월 9일 새벽 대흥사 심적암에서 일본경찰의 총칼에 심적암 스님 5명(6명?)을 포함해서 항일의병 30여명이 참혹하게 피를 흘리고 죽어있던 처참한 모습을 친히 목격한다. 대흥사는 마을 장정을 불러 30여명의 항일의병참사자 시신을 운구해 대흥사 초입에 있는 한 곳에 매장하였다. 대흥사 산중에 피비린내 가득한 비참한 상황을 친히 목격한 봉려관 스님은 이곳에서 자신의 항일의지를 다진다.

< 대흥사 일제강점기의 전경 >

법정사 창건

제주도로 되돌아온 봉려관 스님은 항일운동 하는 사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항일운동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다녔고, 마침내 1911년 서귀포시 도순동 산1번지에 법정사를 창건한 후, 일정기간 친히 법정사에 거주했다.

봉려관 스님이 창건한 법정사는 봉려관 스님이 중창 혹은 창건한 여타 사찰과 비교해 보면, 지리적 여건이 몹시 상그럽다. 지금은 길이 조성되어 다니기 쉽지만, 당시에는 사람이 왕래하기 어려운 지리적 악조건을 안고 있었다. 외부사람 눈에 쉽게 뜨이지 않는 장소이다.

봉려관 스님은 100일 관음정진을 하던 곳에 자주 올라 관음기도를 하셨는데, 이때 한라산 영실 쪽에 기거하면서 차력훈련을 하던 사람들을 법정사에 거주하게 하였다. 그들이 바로 강창규, 방동화, 김연일이다. 강창규 스님은 하이칼라 머리를, 방동화 스님은 상투를 튼 머리를, 김연일 스님도 스님신분이 드러나지 않는 외모로 법정사에 거주하면서 후일을 도모한다. 왜냐하면 스님의 모습으로 항일운동을 하면 바로 신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후 봉려관 스님의 항일의지는 식량, 항일자금, 거처마련, 사람이 필요할 때는 사람을 보내주고, 위험할 때는 은닉시켜 주는 등 매우 신중하면서도 주도적으로 실천하였고, 항일운동 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항일운동을 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보살피었다. 봉려관 스님은 인명을 가장 중시했다.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인해 투옥되어 옥살이를 했던 이들은, 감옥에서 나온 후 봉려관 스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법화사 중창불사를 모두 힘껏 도왔다는 전언도 있다.

< 강창규 스님 >

< 방동화 스님 >

< 김연일 스님 >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봉려관 스님은 대흥사에 항일운동자금을 전달하러 수차에 걸쳐 방문한다. 봉려관 스님은 항일 운동자금 조달 뿐만 아니라, 당시 해남 등지에서 활동하던 항일운동조직 또는 중앙조직과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인사 간 메시지 전달역할도 한 것으로 사료된다.

“방동화 스님이 말씀하시길 ‘우리나라 지형은 항해하는 배와 같고, 제주도는 배의 방향을 잡는 돛과 같다. 그러니 제주도가 먼저 일어나야 우리나라 전체가 모두 일어난다고 해서 그래서 1918년에 법정사 항일운동이 시작된 것이다’고 하셨다”고 한다.

법정사 항일운동은 1909년 봉려관 스님의 항일의지결의에서 시작되었고, 봉려관 스님이 항일운동 거점지로 1911년 법정사를 창건하면서 준비 작업은 마친 것이 된다. 이어서 강창규, 방동화, 김연일 등 승려들이 법정사에 거주하면서 제주도의 본격적인 항일운동이 시작되었다.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은, 법정사와 관련된 승려가 주도한 ‘내 나라를 되찾겠다’는 순수한 제주도민의 항일운동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

제주 항일운동의 빛

제주시 중앙포교당이 창건되기 전까지 항일운동자금 및 항일운동 제반사는 봉려관 스님이 주석하시던 한라산 관음사가 주요 창구역할을 한다. 제주와 오사카 간 항로가 개항한 이후, 오사카에 거주하던 제주인의 항일자금이 봉려관을 통해 육지 독립운동 조직으로 전해 진 것으로 사료된다. 이때 창구역할은 제주 중앙포교당인 것으로 사료된다. 또 봉려관 스님은 불사를 핑계로 제주와 오사카를 수차 왕래했다. 이때 오사카에서 금종을 만들어서 제주도로 가져 오신 것이다.

안광호 스님이 구술하시길, 봉려관 스님의 항일운동자금조달은 초기에는 탁발과 보시 받은 불사금이었는데, 불사는 규모를 축소시켜 작게 하고, 대부분의 보시금을 항일운동자금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1920년대 전후에는 오사카에 거주하던 제주인의 항일자금과 제주도에서 조달된 항일자금을 봉려관 스님이 직접 전달하는 역할을 감쪽같이 해냈다고 한다. 

봉려관 스님이 항일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탁발을 나갔을 때, 어떤 제주 남성은 봉려관 스님에게 “나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면 거금을 주겠다”는 추태까지 자행했다고 한다. 이런 수모까지 감내하면서 봉려관 스님의 탁발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봉려관 스님은 표피적 항일운동이 아니라 내면적 항일운동을 하신 분이다. 혹자는 봉려관 스님이 전달한 군자금의 규모를 묻는다. 항일운동은 비밀결사체임을 우선 인지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당시 항일운동 제반사는 극비리에 실천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 [BBS뉴스] 법정사 무장항쟁과 봉려관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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