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당 봉려관
제주불교 최초의 비구니 스님들어가는 말
제주의 민간신앙은 예로부터 제주인의 생활과 함께해 왔으며, 제주인의 마음 속에 자리 잡았다. 이후 여러 종교가 제주에 들어와서도 그 원형을 상실하지 않는 제주인의 신앙 뿌리이다.
고려시대에는 제주의 광양당을 국사당으로 지정해 국가적 차원에서 민간신앙을 인정하였고, 불교와 민간신앙은 큰 마찰 없이 절에도 가고 당에도 가는 신앙형태가 형성된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통치이념은 민간신앙과 불교를 탄압하였고, 민간신앙과 불교는 축소 또는 퇴락하게 된다. 그 대표적 예가 이형상(1653~1733) 제주목사의 신당, 사찰 훼철이다.
제주불교는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부임(1702~1703)하면서 폐사훼불이 자행되었고, 이로 인해 쇠퇴되었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당시 사원 철폐는 물론 승려활동 및 공식적 불교의례까지도 소멸되었다고 한다.
후임으로 이희태(1669~1715)가 제주목사로 부임(1703~1704)하면서 신당은 재건되었고 굿도 허용되는 등 심방의 위상은 회복되고 신앙생활도 계속되었다. 반면 불교는 좀처럼 재건되지 못하고 쇠락이 계속되었다.
<탐라순력도 ‘건포배은’ – 각 마을에 있는 신당과 사찰이 불타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관세음보살상
봉려관 스님(1865~1938)은 1865년 6월 14일(음) 제주 화북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친은 순흥 안씨이고 모친은 신씨이며 차녀이다. 속명은 안려관이다.
봉려관 스님이 35세 되던 서기 1899년 가을, 집앞을 지나던 비구스님이 나무로 조성된 조그마한 관세음보살상을 건네주면서 “방안 깨끗한 곳에 잘 모시고 아침저녁은 물론 시간 여유가 있을 때마다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아들딸이 단명할 것이니 그리 알라!”고 한 후 가버렸다. 이것이 봉려관 스님 삶의 큰 전환점이 된다.
그날부터 봉려관 스님은 관세음보살상을 방안에 모시고 ‘관세음보살’ 기도를 열심히 했고, 이로 인해 유학자인 남편 현국남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러나 봉려관 스님의 관음정진은 계속되었고, 결국 집을 나올 결심을 한다.
1901년 초, 화북리 같은 마을에 집을 구한 후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혼자 살며 부지런히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였다. 하지만 또 얼마 되지 않아 화북동리 사람들이 관세음보살상을 부수며 “다시는 관세음보살을 부르지 말라.”며 강력한 반대를 하였다. 그리하여 동리사람들에게 다시 쫓기어 나왔고, 1901년 초봄에 한라산 산천단에 조그마한 초막집 1채를 짓고는 관세음보살 기도를 계속하였다. 동리사람들이 불상을 파손시켜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거처에 모실 불상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비양도에 불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01년 늦봄에 비양도로 불상을 구하러 간다.
비양도
배를 타고 비양도로 불상을 구하러가던 중, 바다 한 가운데에서 맹렬한 폭풍을 만나 배가 거의 전복되려했다. 당황해 허둥지둥하던 상황에서 봉려관 스님은 도리어 지성으로 관세음보살을 염송했고, 옷과 버선이 젖지 않은 채 어언 간에 비양도에 도착했으며, 그리고는 바닷가 어느 집에 머물게 되었다.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으로 이렇게 무사한 것임을 직접 체험한 봉려관 스님은 이후 더욱 부지런히 관세음보살 기도에 매진한다. 비양도 가던 도중의 체험은 어떤 어려움도 관세음보살님의 위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 부여에 일조하였고, 향후 제주불자의 신앙관과 수행관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관음신앙에 대한 확신은 많은 사람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발현되도록 하였다. 즉 비양도 가던 도중의 체험은 봉려관 스님에게 하화중생 의지를 발아하게 한 밑거름 역할을 하였고, 하화중생의 비장한 의지는 비양도에서 되돌아온 후 산천단에서 발아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비양도에서 불상을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온다.
집을 나와 반년도 안 된 시간에 봉려관 스님의 삶에는 아주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그녀는 이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가고 있었다.
비양도에서 불상을 구하지 못하고 산천단으로 되돌아온 봉려관 스님은 쉬지 않고 ‘관세음보살’ 기도를 했다. 비양도 가던 도중 바다 한 가운데에서 태풍을 만났으나 관음기도를 해서 바닷가에 무사히 도착하게 된 것이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이라 믿었다. 그 후 계속해서 이 때의 일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으며, 마침내 염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구제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마음 속으로 한다.
“만일 나의 뜻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면 맹세코 머리를 빗지 않을 것이다.”하고 결심을 혼자 되뇌었다. 그리고는 줄곧 촌락을 다니면서 제주도민을 부처님 가르침 안으로 인도하려는 시도를 5~6년간 했지만, 봉려관 스님을 향한 수모와 핍박은 여전했고 봉려관 스님은 이를 감내한다.
1907년 9월, 스님이 될 생각으로 배를 타고 목포로 갔다. 고통에 처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광제중생), 이것이 바로 봉려관 스님이 출가수계를 결심한 계기이다.
출가 수계
목포에 도착한 봉려관 스님은 정처 없이 주변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각 사찰을 돌아보던 중 대흥사를 알게 되었고, 길을 물어가며 간 곳이 해남 대흥사였다.
대흥사 박영희 스님의 구술에 의하면, 봉려관 스님은 해가 설플 때 대흥사에 도착했지만, 행색이 남루하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으며 몰골이 거지같아서 주지스님이 한 번 보고는 더는 만나주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봉려관이 출가 수계하고자 대흥사에 왔다는 의사를 직접 전달하지만, 행자 교육을 받지 않고는 수계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듣는다.
대흥사에 주석하던 스님 한 분의 도움으로 며칠간 기거하면서 산중을 돌아보던 중, 살이 곪아 썩어가는 스님을 발견한 봉려관 스님은 환자를 고쳐보겠다고 했지만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런데 봉려관 스님이 대흥사에 도착하기 전날, 대흥사에 거주하던 스님 한 분의 꿈에 ‘내일 환자를 고칠 사람이 온다.’는 꿈을 꾸었고, 꿈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한센병 환자를 봉려관 스님에게 맡겼다.
봉려관 스님은 묵은 된장과 몸을 감쌀 천을 달라고 해서, 썩어가던 상처부위마다 된장을 바른 후 전신을 광목천으로 둘둘 말고는 환자에게 “지금부터 관세음보살을 지성으로 염불하시오.”라고 당부했다. 며칠이 지나고 봉려관 스님이 광목천을 벗겨내자 온 몸에 구더기가 바글바글했다. 봉려관 스님은 감았던 천으로 환자 상처에 발랐던 묵은 된장을 쓸어내고는, 마당에 멍석을 펴고 멍석 위에 아궁이 재를 깔아 놓으라고 한 후, 환자를 멍석 위 아궁이 재 위에 눕히고는 둥글렸다. 그러자 환자 몸 여기저기에 바글거렸던 벌레가 아궁이 재 때문에 죽어갔고, 이 관경을 훗날 대흥사 주지소임을 수행했던 박영희 스님도 보셨다.
봉려관 스님은 이 환자를 손수 씻겨 주었다. 그 후 썩어가던 상처 부위에 딱지가 앉기 시작했고, 그 환자 스님은 완쾌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대흥사 스님들은 봉려관 스님을 달리 보았고, 온 대흥사 산중이 떠들썩했으며, 거들떠도 보지 않던 봉려관 스님에게 대중공사를 해서 계를 주기로 했다.
봉려관 스님은 당시 대흥사 청신암에 계시던 비구니 유장을 은사로, 비구 청봉화상을 계사로 모시고, 1907년 12월 8일 성도재일에 출가수계하였다. 삭발은 유장비구니가 했고, ‘봉려관’이라는 법명은 대흥사 조실스님에게 받았다.
이로써 제주불교 최초의 비구니가 탄생한 것이다.